작가노트4

태양은 수면위로 떠오르고 새벽노을이 다시 너울거린다.
가자, 햇살이 어른거리는 저 아래로 내려가자, 나의 친구여.

우리는 지금 단지 잠들고 있는 것일까 다만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다시 춤을 추고 있는 것일까 그곳은 天上일까

심연의 장막을 걷어 젖히고
우리는 물결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간다.

이제 물살은 견딜만 해졌고
빛은 불꽃처럼 춤춘다.
햇살이 비치는 곳에서는 타들어감은 없어. 아, 이 얼마나 멋진 게임인가.

가자, 저 아래로
다시 내려가자, 나의 친구여.

Patti Smith의 노래 Going under 中에서

세우라, 흔들리는 심연에 용감하고 엄숙하게 둥글고 빛나는 마음의 집을!

니코스 카잔차키스

모과 _김언희

죽어서
썩는
屍臭로 밖에는 너를 사로잡을 수 없어

검은 屍班이 번져가는 몸뚱아리 썩어갈수록 참혹하게
향그러운

이 집요한, 주검의 구애를

받아다오 당신

폐마도살업자_사진

작가노트3

목림상 전 (2019)

“여러분은 사제와 수사에게 가느니 나무에게 고백하러 가는게 낫습니다.”

-[치즈와 구더기]에서 이단으로 몰려 재판정에 선 물방앗간 주인 메노키오의 진술

어느 날 새벽 나무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나무들은 더 이상 내가 바라보는 대상으로서의 나무가 아니라, 오히려 나를 사유하는 주체가 되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날, 그들은 오래전에 그들이 누렸던 대지와 천상 사이를 떠받쳐 주는 기둥으로서의 세계수, 혹은 수목신의 모습으로, 혹은 누군가를 불러 세웠던 불붙은 떨기나무의 모습으로, 지금 막 떠오르는 새벽 태양과 함께 우뚝우뚝 솟아 올랐다. 나무들은 태어난 그 자리에서 주어진 운명을 거부함이 없이 언제나 한결 같은 모습으로 묵묵히 자신의 내면애 몰입함으로써 어느 덧 누리게 된 충만함과 원광처럼 빛나는 무위의 침묵으로 내게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그 순간 내게 어떠한 수식도 거부한 채, 자신의 고유한 상승과 하강의 존재방식을 내게 체험하도록 이끌었다고 나는 기억한다.

나는 온 힘을 기울여 나무들이 내게 열어 보이는 저 내면의 길에 들어서기를 결행하기는 했지만, 내가 결코 뛰어넘어서지 못할 나의 한계지점에서 그들의 이끌림을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한 채 숨을 몰아 쉬고 있을 때, 나무들은 그들이 나를 통해 이루고자 했던 사유의 궁극적인 정점에 도달하지 못한 채, 서서히 내게서 떠날 채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나무들이 그 날 내게 요구했던 만큼이 아니라, 내가 감내할 수 있는 만큼 밖에는 나무들을 체험하지 못한 채 그림을 끝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수목들이 그날 내 눈 앞에서 이루었던 신전인 이 새벽 숲들은 미완인 채 남겨지게 되었다. _1991년

“기독교에서는 창조주가 인간을 가장 공들여 빚었다고 하지만 제 생각엔 수목이야말로 창조주의 역작인 것 같아요. 바람이 제 작업실 뒷산 수목들을 휘감는 소리… 이제 곧 녹색 촛불들이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타오르는지 알려하지 않고 다만 하늘을 향한, 다만 심연을 향한 갈망으로 충만해하는 수목들의 신전을 이루겠지요.”

나무처럼 살기를! 저 아름답고 강한 집중! 저 놀라운 생장을 보라! 저 깊이를 보라! 저 곧바름이란! 저 진실이란! 곧장 우리는 우리 자신 속에서 뿌리가 움직이는 것을 느끼며, 과거는 죽지 않았다는 것을 느낀다. 오늘 우리에겐 무언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불확실한 생 속에서, 지하의 삶 속에서, 외로운 우리의 삶 속에서, 대기의 삶 속에서 느낀다. -바슐라르

작가노트2

The Works For Workers (2010.9.08.-10.15)

내 작업실은 산막리에 있다

허물어져가는 빈 집들이 절반이고, 연로한 농부들이 평생 땅을 일구며 살아온 산의 막바지 마을이다.

여명이 밝아오는 여름 새벽, 새소리와 경운기 소리, 호미질 소리와 괭이질 소리가 나를 깨운다. 허리가 굽어 네발짐승처럼 걸어다니면서도 호미질이 밥이라고 풀이 않난 곳까지 호미질을 하시는 할머니의 밭은 우리집 안방보다 깨끗하다. 농사짓는 소리가 지나면 고물장수와 잡화장수, 깨진 유리창과 방충망을 고치는 아저씨의 트럭에서 마이크 소리가 간간히 들린다. 그 소리들은 외양간을 작업실로 쓰던 아랫마을에서부터 10년 넘게 들어오던 소리다. 그리고 이따금 비행훈련 소리가 들린다. 작업을 마주하고 듣는 비행기 소리는 영화 ‘양들의 침묵’에서 보았던 닥터 한니발의 베이컨(Francis Bacon)적인 내 작업실을 지구로 귀환하지 못하고 우주를 떠도는 우주선처럼 느끼게 한다.

이곳에 이사 오기 전에는 소들이 이십년 넘게 기거한 외양간이 작업실이었다. 오년 넘게 비어 있던 곳이지만 나는 늘 소들의 체취를 느꼈다. 외양간 뒤편에는 그 동네에서 유명한 ‘농사도사’의 기름진 담배밭이 푸르르고, 알래스카 숫사슴 한 마리가 소나무꽃처럼 자라 오른 뿔을 이고 절망적인 몸짓으로 서성이는 우리가 있었다. 유월쯤이면 뿔 잘린 사슴이 뿔에 붕대를 감고 주저앉아 귀를 자른 채 파이프를 물고 있는 고흐의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9년 넘게 나는 작은 들창 너머로 농사도사의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내 그림농사를 지었고, 알래스카 숫사슴과 절망도 함께 했다. 말이 아닌 몸으로 스스로가 되어가는 농부들과 나무들이 늘 내 곁에 있지만 나는 아직 그들의 묵묵함에서 멀리 있다.

산막리에서의 일들을 정리하며 “The Works for Workers”라고 이름 붙일까 한다.

사전에 의하면 work란 1.일,노동,공부,연구,과제,작업,노력 2.(생활을 위한)일(자리),직업 3.(종종~s)행위, 행동(deed),짓(act) 4.(pl)토목,공사,건조물 5.(예술)작품,저작을 의미한다고 되어있다.

15장의 미노타우로스(Minotauros) 연작은 상념의 미로를 탐색하는 소에 관한 공부였다. 10장의 Unknown workers 연작은 카프카의 동물들처럼 짐승이 되어서야 실존의 상태에 이르는, 자신의 한계를 work하며 실존의 도정에 있는 존재들에 관한 공부들이었다. Works for Hearts 연작은 그들의 상흔에 관한 공부들이 아니었을까.

돌이켜보니 지난 25년 동안의 작업들은 work(deed)에 관한 공부였던 것 같다.

시지프스(Sysiphus)에 관한 공부들, 나무의 나무되기에 관한 공부들, 자신의 심연에로의 하강을 수행하는 유영하는 사람들에 관한 공부들, 수련연작을 하고 있는 86살의 모네에 관한 공부들, “노동은 나의 강령이다”라고 말했던 밀레의 농부들에 관한 공부들. 밀레의 농부들은 내게 시지프스의 초상이었다. 그가 그린 키질하는 사람들은 곡식 낱알이 빛 알갱이가 되고, 키질이 무도가 되어갈 때 까지 키질을 계속한다.

The awful daring of a moment surrender

which an age of prudence can never retract.

By this and this only, we have exist.

-The Waste Land, T.S.Eliot

노련한 분별로도 삼갈 수 없는

한순간의 귀의, 그 경이로운 결행

이것으로 이것만으로 우리는 존재해 왔느니.

등에 맺힌 이슬방울이 입으로 굴러내리는 것을 받아먹기 위해 이른 새벽 나미브사막의 딱정벌레들은 어김없이 사구에 달려 올라가 물구나무를 선다. 딱정벌레들의 등에 맺힌 물방울이 이슬방울인지 땀방울인지 나는 모른다.

늘 한계와 회의, 무력감과 공허에 시달리지만 일(work)은 그런 잡초들을 잠시나마 뽑아준다.

작가노트1

영정 전 (2013)

이 영정들은 작년 가을 내 작업실 돌담 밖을 서성이던 낯선 할머니로 인하여 시작하게 되었다.

지나가는 길에 여기 살던 친구가 생각나서 들렸노라고 하시기에 이 터를 내게 팔고 서울 아들네로 가신다던 할머니의 안부를 물으니 가신지 1년 만에 자살을 하셨다며 말끝을 흐리시는 것이었다. 며칠을 할머니 생각으로 가슴앓이를 하다가, 작업실 한 켠에 할머니를 처음 만났을 때 인고의 세월이 아로새겨진 할머니의 얼굴이 아름다워 찍어 드렸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사진으로나마 이곳에 계시라고 붙여 두었던 사진들은 이미 빛이 바래져 있었다. 이곳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다 떠난 그 분을 그려드리는 것, 그것만이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진혼의 의식이었다. 그렇게 할머니의 영정을 그리면서, 오랜 세월 작업실 여기저기에 부적처럼 붙혀 두었던 사람들의 사진도 하나하나 눈에 들어왔다.

오래전 책에서, 신문에서, 길에서, 영화 속 화면에서 내 시선이 꽂혔던 그 얼굴들은 나에게 삶과 죽음의 비의를 전하기 위해 보내진 밀사들처럼 수 십 년 동안 한결같은 비장함으로 작업실의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달팽이처럼 웅크리고 앉아 가을숲에 귀 기울이고 있던 눈먼 소년, 나는 그 소년의 눈꺼풀 속 가을 숲을 그려보고 싶었다. 천 년 전 어느 고승이 불렀다는 못다 이룬 사랑노래를 부르며 내게로 걸어왔던 미친 여승, 나는 눈물 가득한 그녀의 눈망울에서 고승을 그리워하는 공주의 사무친 모습을 보았다. 어머니의 손에 뉘인 죽어가는 병자의 얼굴, 나는 아침 햇살이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것을 보았다. 영화 Runaway Train에서 탈옥수역을 하는 존 보이트, 그는 젊은 동료를 살리기 위해 고장 난 기차를 탈선시켜 죽음을 향해 달리고 있다. 어느 날 아침 신문에서 마주친 아내 살해자로 체포된 광부, 그의 얼굴은 살해자의 얼굴이 아니라 수난자의 얼굴이었다. 이스라엘군에 의해 피살된 동생의 복수를 위해 자살폭탄테러를 감행하기 직전의 팔레스타인 청년의 모습, 그 입가의 미소… 그들이 아니었으면 길을 잃었을 내 정신의 등불들, 돌아가시고 나서야 비로소 그 품에 안길 수 있었던 아버지, 쉰이 넘은 딸이 그리는 스무살 아버지…

그들의 얼굴에는 사는 동안 그들과 함께 했던 신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골고다의 언덕에 끌려가는 예수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준 베로니카의 손수건에 새겨졌다는 예수의 얼굴처럼, 모든 사람의 얼굴은 신의 모습이 아로새겨진 베로니카의 손수건이 아닐까.

한강_어떤지옥

어떤 지옥,

뭉게어진 얼굴,

당신은 뭉게어져 봤는가.

철저히, 윤곽없이, 살과 얼굴이 뭉게어졌는가.

그 기억이 당신의 존재를 시시때때로 문지르고

그 자리에서 피가 흐르는가.

어둠 저 편에서 나를 바라보는 얼굴,

그 눈을 똑바로 마주 본다는 것,

내 심연에서 지금 막 솟아오르는 얼굴,

빤히 올려다보는 응시하는 눈…

다만 명징한 눈

그 눈이 왜 무서웠을까.

나도 명징하게 마주보면 되는데

명징하게

명징하게

그 순간 낸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문득 알았다.

당신

당신이 저 지옥을 겪었(는)다 해도

제 집처럼 지옥을 샅샅이 알고

귀신처럼 어둠 저 편을 뭉게진 채 헤맨다 해도

저 눈을, 저 얼굴을, 저 명징한 눈으로 마주 모았다면,

명징하게 응시해 냈다면, 당신은 이긴 것이다.

당신은 이긴 것이다.

그 말을 되뇌는 동안

눈물은 계속 흘러 내렸다.

나는 이길 수 있을까,

나는 패배하지 않았나.

_ 금산화랑 전시를 보고

평론_신방흔, 1991

김명숙의 회화는 범신론적, 범미학적 주장으로 가득한 듯이 보인다. 범미학적이라 함은 자연과 우주내에 존재하는 만물의 고유법칙들을 인정하고 더 나아가서 거기에서 공통되는 미학 관점을 추출하여 그것을 보편화, 추상화 시킴을 의미한다. 김명숙은 자연과 인간(자연 중 대표적이랄 수 있는)을 주로 다루는데, 그 자연과 그 자연의 일부로서의 인간의 모습과 흔적들에는 이러한 존재로서, 그리고 동시에 그것을 초월하는 존재이고자 하는 주장 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명숙의 숲은 화면 가득히 올오버되어 있는데, 둥치는 강건하며, 세부는 풍부하고도 세밀하게 묘사되어 아름답게 빛난다.

이러한 숲은 신성림이다. 여기에는 나무의 정령들이 살아 호흡하고 있으며, 서로 교감한다. 이 숲 안에서는 소리와 색들과 냄새들이 끈임 없이 서로 상응하고 있다. 나무들은 이 신성한 숲을 바치는 신전의 기둥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자연을 넘어서서 초자연을 지향하고자 하는 데, 즉 범신적 초자연으로서의 보편적 존재방식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화면은 이러한 작가와 작품을 지배하는 내밀한, 초월적인 내용에 합당한 형식으로 추구되고 있다.

화면은 수사와 장식을 피하고자 거의 모노톤에 가까웁게 색채가 제한되고 있다. 이것은 화면에 무게를 주며, 단정하고도 엄숙한 분위기를 연출하게 한다.

이러한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키기 위해 작가가 풍요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 광선의 효과이다. 그의 화면에는 스포트라이트(spotlight)적인 집중 광선이 즐겨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화면 전체를 하나로 통일해내는 한 개의 강력함이기도 하고 때로는 여러 개의 작은 것들로서 부분을 집중시키면서 전체를 올오버 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나머지 부분은 깊고도 어두운 단색조로 처리되고 있다. 따라서 집중광선을 받는 부분은 어두운 배경위로 신비롭고도 긴장되게 떠오른다. 그리고 화면 전체도 역시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신비함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광선아래 작가가 소재로 사용하는 인물이나 자연물의 형태를 이루기 위해 수많은 선들이 사용되고 있다. 즉 수없이 중첩된 선들로서 형태가 이루어지고, 때로는 스크래치된 선들이 앞서 언급한 광선효과 아래 반사된 빛줄기와도 같이 분산되고 집합한다.

이 선들은 광선효과와 어우러져 김명숙 회화를 특징짓게 하는 중요한 조형 요소가 아닌가 한다. 수많은 중첩된 선과 스크래치에 의해 이루어진 형태는 견고한 조각적 모델링을 가지기 보다는 주관적 감성을 강조하고, 분위기 위주의 표현적 형태들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색점이나 색면, 외각선에 의지하기 보다는 선 자체의 운용과 그것의 표현성에 그의 화면은 많이 의거하며, 페인팅의 범주보다는 드로잉의 범주에 좀 더 접근하는 일면을 관찰할 수 있다.

화산은 조용히 휴식하고 있는 듯하지만, 때로는 파괴적이고 폭발적인 매우 커다란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그 분화구는 우리가 내밀한 언어를 끄집어내기에 충분하고 풍부한 보고를 가진 듯 하고, 이 언어들을 삼키고 있는 존재,굳이 형태화한다면 아마도 웅크리고 있는 모습인, 인간을 충분히 감추어야 할 만한 장소이다. 즉 이것은 상상의 보고이고, 잠재된 힘의 보충에 대한 희망이다.

이 분화구는 단일 이미지로 화면 전면에 간략하고도 역시 스포트라이트적인 광선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통상적인 방법 즉 대상을 부각시키는 방법으로가 아니라 배경 면을 비추게 하여 대상이 역으로 어두웁고도 무겁게 드러나도록 하는 방법으로이다. 그리하여 전면에는 단색조의 어두움이 드리우며, 분화구에서 뒤로 갈수록 신비한 빛들이 유출되고 필회들이 살아 반사되게 하여,이른바 역대기원근법적인 효과를 내고 있다.

이러한 효과는 인물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스냅사진처럼 잘리워진, 찰나적인 순간의 한 부분을 포착한 듯한 인물의 단면들로 매우 모뉴먼트하게 처리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긴장된 내밀한 언어들은 모두 존재의 힘에서 비롯된 것임을 작가는 환기시키고자 한다. 그리고 이것이 김명숙 회화의 세계이고 개성이며 표현영역인 것이다.

신방흔 1991 공간 전시리뷰

평론_김수기, 1995

현대미술은 장인적 숙련성이 지배하는 특별한 영역으로서의 회화가 갖는 역사적 지위에 대해 이미 이론적 논증을 마무리한 것으로 말해진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김명숙은 장 인적 기량과 예술만의 독점체계, 이를테면 진정성, 유일성, 정신성 등에 기초한 회화의 옛가치를 철저히 고수하려한다. 그리고 그 끈기와 무관심한 듯한 초연함은 이제는 죽어버렸지만 저 빛나는 신화를 되살리려는 영웅의 고통스러운 싸움임을 말해준다. 하긴 ‘새로움의 미학’이 선택받은 자들의 특별한 게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박판에서와 같은 광기가 거세게 지배해 온 현대미술의 발자취를 돌이켜 보면 우직스럽고 끈질긴 그 태도가 주목받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일 수도 있겠다. 통산적인 관찰이나 구경의 대상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내면적 생활의 거울이자 대화의 상대자인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자연은 우리에게 아스라한 과거를 연상시킨다. 현대적 조건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저 근대에 대한 낭만주의적 태도가 그것이다.

그림의 전반적인 톤은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어두운 가운데, 그 사이 간간히 베어든 빛의 효과는 일종의 종교적인 경외감을 느끼게 하며, 어두운 톤에 간간히 베어든 빛의 효과 역시 더할 나위 없이 신비스러운 뉘앙스와 분위기를 강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작가의 금욕적인 절제가 베어있어 언어의 의미효과를 초월한 듯이 보이게 한다. 절대적인 존재 앞에 선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인간이 취할 수 있는 태도와도 같은 저 신화의 한 장면이다. 거기에 거개의 작품들이 전시장 한 벽면을 가득 채우는 듯 장대한 스케일을 갖고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실재의 그 신비로운 나무 숲 혹은 그 숲의 실체인 절대적 힘을 마주하고 있는 느낌마저 준다. 그녀를 불러 세웠을 더 강력한 세계 속의 주권적 존재 앞에.

김명숙의 그림은 자기 자신의 체험방식에 깊이 몰입되어 있는 까닭에 외부세계에 패쇄적일 정도로 닫혀있다. 작품 외양에서의 어두운 톤이 불러일으키는 정서적 효과와 그 어두움과 빛의 효과가 일으키는 미묘한 깊이감은 그 정도를 헤아릴 수 없을만치 열려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 열림은 그녀 이외에, 다시 말해 스스로 체험했다고 하는 작가 외에는 선뜻 나서기가 쉽지 않은 폐쇄적인 열림이다.

이처럼 보는 사람은 의식적이든 아니든 그녀의 물질문명에 대한 무관한 갈망을 느낄 수 있다.그런데도 작가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수공적인 작업이 주는 정성스러움을 다하고 있다.자연의 가장 미묘하고 연약한 부분들까지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자연에 대한 튼튼한 기초소묘력이 소중하고도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대상에 대한 그녀의 감각을 객관화시키기 위해 애쓴 흔적들인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에게서 끊임없이 빠져나가려 하는 대상을 가시적으로 붙들기 위한 영웅적인 노력의 일환처럼 보인다.

이것은 불가능한 모험처럼 보인다. 그림의 표면은 장인적인 기질과 물질성이 가득 배어있지만, 실재 그림이 지시하는 것은 그 표면에 대해 너무나 초연하고자 한다. 광학적인 깊이의 환영을 통해 블랙홀적인 내면세계로의 공간이동을 시도하고 있다. 김명숙은 ‘새로움의 미학’이 숨가쁘게 앞만 내다보고 달린 결과 놓치고 만 소중한 것들의 생명력을 조금 더 보존하려하는 것일까? 회화의 죽음에 대한 선언보다 더욱 위축시키는 현실이 앞에 놓여있는 동시대의 문화조건은 회화의 존재론적 기반을 위협하는데 있어서 정점에 달한 듯싶다. 이론적으로는 ‘문화’라는 개념에 대해 사람들이 언급하기 시작했고 구체적인 일상에서 범람하는 ‘이미지’들이 있다. ‘가상현실’, ‘컴퓨토피아‘, ’인터액티브‘, ’인포아트‘, ’커뮤니케이션‘ 등 예술과는 이질적인 용어들이 어떤 식으로든 반영될 조짐은 가까이 광주비엔날레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일이었다. 비록 그녀가 새로움의 미학이라는 게임을 비껴서기는 했지만 이 문제에 어떻게 대응 할 것인가는 앞으로의 힘겨운 과제일 것이다. 이 싸움은 그 전의 싸움처럼 결코 쉽게 처리할 수 있는게 아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패쇄적으로 지키려고 애쓸수록 옥쇄처럼 죄어들 것이다. 물론그렇게 죄어든 공간이 지금의 그 초월적인 세계일 수도 있지만.

김수기 1995, 가나아트 전시리뷰에서